앨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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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42대 뉴욕주지사이자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였다. 민권과 금주법 문제에 있어 진보적인 식견을 표방하였지만 태머니 홀[2] 유착 논란과 개신교 우위 국가에서의 가톨릭 신자 후보라는 약점 등으로 인해 허버트 후버에게 대참패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2. 생애[편집]
2.1. 뉴욕 주지사[편집]
2.2.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관계[편집]
앨 스미스는 개혁 성향을 바탕으로 민주당으로 도시, 블루칼라, 가톨릭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를 발전시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노동자 계급과 가톨릭 교도, 보수적인 남부지역, 흑인, 대도시 거주자, 빈민층 등을 묶은 뉴딜동맹을 구성해 민주당 전성시대를 만든만큼 두 정치인은 민주당의 역사에 중요한 장을 같이 장식하고 있지만 정작 둘의 관계는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둘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1924년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정계로 복귀한 루스벨트가 앨 스미스를 위해 감동적인 연설[3] 을 하면서 당의 단합을 호소했고, 비록 이 경선에서 스미스가 패하긴 했지만 4년 뒤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을 받아낸 스미스는 루스벨트를 자신의 후임 뉴욕 주지사 후보로 추천하며 서로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결국 스미스는 이번에는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후보에게 큰 차이로 낙선하고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뉴욕에서도 패했지만, 루스벨트는 0.62%p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공화당의 알버트 오팅어를 누르고 승리해 제44대 뉴욕 주지사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는데, 대선에서도 패배하고 뉴욕 주지사 자리도 루스벨트에게 내준 스미스는 뉴욕주에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루스벨트가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한 것. 스미스는 부정부패로 악명높은 뉴욕주의 정치사조직 "태머니 홀"의 일원이었고 당연히 태머니 홀에 소속된 자신들의 측근이 요직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태머니 홀을 멀리하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4] 거기다 스미스는 루스벨트에게 자신이 했던 진보적인 정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뉴욕을 이끌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루스벨트는 2년 뒤 재선 도전을 생각해 이때는 다소 기존에 비해 보수적으로 주지사 직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에게 앙심을 품게 된 스미스는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치러진 1932년 대선을 앞둔 민주당 경선에서 루스벨트의 대항마로 출마를 결심한다. 원래는 1928년 대선 패배 이후 모든 당직에서 물러나는 등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루스벨트가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심판론에 편승해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해지자 이를 막기 위해 나온 것. 이 과정에서 1924년 대선에서 대립한 정치적 앙숙인 윌리엄 깁스 매커두와도 손을 잡았다.[5] 하지만 루스벨트는 존 낸스 가너와 타협해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다.
이후로도 앨 스미스는 죽는날까지 루스벨트를 용서하지 않는 뒤끝을 부렸으며,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면서도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알프 랜던을,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탈당파 출신의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6]
3.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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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학교 수준의 학교이다.[2] Tammany Hall,뉴욕주,뉴욕시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이 주류였던 정치 기구로 부패와 계파정치로 악명높았다.[3] 이 과정에서 앨 스미스를 "정치적 전장의 행복한 전사"로 극찬했는데 이것이 스미스의 별명이 되기도 했다.[4]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태머니 홀을 때려 잡았고, 루스벨트가 죽은 1944년까지 태머니 홀은 뉴욕에서 힘을 잃게 된다. 그나마 1950년대에는 사정이 풀리나 싶더니 엘리너 루스벨트가 태머니홀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도루묵이 되고, 결국 1960년대 태머니 홀은 해체된다.[5] 다만 매커두는 앨 스미스 대신 존 낸스 가너를 지지했다.[6]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대선후보인 존 W. 데이비스도 동일한 행보를 보였다. 즉 1924년 대선의 대권주자들이 모두 루스벨트 반대 운동을 펼친 것.